사랑하기를 선택하는 삶 (1996년 로제 수사의 편지)
1996년을 위한 편지 23개 아시아 말과 7개 아프리카 말을 포함해 58개국어로 번역된 이 편지는 1995/96년 연말연시 폴 란드에서 열린 제 18회 젊은이들의 유럽모임을 위해 로제수사가 썼습니다. 이 편지는 1996년 한 해 동안 매주 떼제에서 열리는 젊은이 모임 동안 묵상자료로 쓰입니다. 이 모임에는 동서 유럽 전역과 다른 대륙으로부터 수많은 젊은이들이 참가하게 됩니다. 이 편지의 일부는 1995년 로제 수사가 몇 몇 형제들과 함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보낸 기간동안 준비되었습니다.
아몬드 나무가 첫 봄기운에 꽃망울을 터뜨리듯 신뢰의 숨결은 마음의 사막에 다시 꽃이 피게 합니다.(1) 이 숨결에 실려 움직일때(2) 그 누가 인간의 고통과 시련을 덜어 주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발걸음이 돌부리에 채어 비틀거릴 때조차 복음의 이 말씀을 자기 삶 속에서 살아가려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너희가 가장 작은 이, 가장 보잘 것 없는 이 하나에 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나에게, 그리스도에게 하는 것이다."(3)
그리스도 이후 1세기가 흘렀을 때 한 신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기쁨을 옷입어라... 몹쓸 슬픔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하라, 그러면 그대는 하느님을 위해 살게 될 것이다."(4) 하느님을 위해 사는 사람은 사랑하기로 선택합니다. 그런 선택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변함 없이 깨어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랑하기고 결심한 마음에서는 가이없는 인자함이 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은 가까이 그리고 멀리 있는 사람들의 고난을 덜어 주려는 염원으로 가득찹니다. 하느님을 위해 사는 사람은 전대미문의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닫습니다. 곧,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에 오셔서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님의 현존으로 충만해 있다는 것을.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시기 전에 우리에게 그것을 이미 확언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성령을 보낼 터인즉, 그분은 너희 안에 항상 계시리라"(5) ... 잠시 한 순간이 아니라 영원히.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지상에 계시는 동안 당신의 사람들을 대하셨던 그 인격 그대로 오늘 우리를 대하십니다.(6)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생명이 되십니다.(7) 우리의 몫은 바로 우 리 마음 있는 그대로를 그분께 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복음의 비밀 하나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의 우리 삶이 그리스도와 성령께 드리는 우리의 신뢰에 온전히 달려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마음의 안개가 신앙의 겸손한 신뢰(8)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버리시지는 않습니다. 그분의 사람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님의 용서로부터, 님의 현존으로부터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비록 우리 안에 실망이, 심지어는 의혹이 생겨난다 하더라도(9) 그분이 우리를 덜 사랑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바로 거기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발걸음을 밝히십니다... 끊임없이 님의 부름이 울립니다. "와서 나를 따르라!"(10) 굳센 마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은 반짝하다가 꺼져 버리는 그런 불꽃을 지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신뢰는 투명함을 요구합니다. 우리 자신의 믿음을 지나친 형태로 드러낼 때 그것은 다른 사람을 혼란스럽게 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 영적인 교만이 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한 뿐더러 마침내는 우리 영혼의 신비로운 열망을 꺼버리고 말 것 입니다. 가깝고 먼 기억에 의해 되살아난 고통들은 신뢰의 숨결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복음은 뒤돌아보지 말라고,(11) 지난 실패와 우리 마음 깊이 상처를 준 것에 계속 맴돌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혼자서 온갖 상념에 잠길 때 우리는 혼란에 빠지고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모순적인 감정에 휩싸였을 때 마음의 기쁨을 유지하기 위해 "내 어둠이 나에게 속삭이지 못하게 하리라!"며 거듭 과감히 자신을 추스르는 것도 가능합니다. 담대히 기도에 몰두하고 평온한 기쁨이 감돌 때까지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12) 보통 기쁨이 아니라 복음의 원천에서 직접 솟아난 그런 기쁨이 감돌 때까지...
너무나 흔히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모릅니다.(13) 하지만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 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14) 그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기도를 자아내고 뒷 받침하십니다. 우리가 분심을 가지고 산만해질 때 성령은 내적인 일치를 북돋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음의 평화가 없이는 내적인 일치도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께서 지상 생활 동안 기도하셨고 그분의 얼굴은 찬란한 빛으로 변모되었습니다.(15) 그분은 간곡한 청원을 드리면서 또한 눈물로써 기도했습니다.(16) 우리 모두 안에서 하느님은 기적을, 영혼의 치유를 이루십니다. 경이로움에 젖어 우리는 찬미하는 마음으로 거기에 응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도가니 속에 근심과 걱정, 불안을 모두 던져 버림으로써, "몹쓸 슬픔"에서 벗어나야 합니다.(17) 복음의 기쁨, 찬미 하는 마음은 우리가 매순간 거듭 우리의 내적인 결심을 새롭게 할 것을 요구합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 앞에서 우리는 마음 깊숙이 사로잡히고 그리스도의 성성(聖性)으로 나아가는 길을 예감하게 됩니다.(18)
화해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친교를 발견한 사람은 고립 속에 살 아갈 수 없습니다.(19) 그리스도의 몸인 이 친교의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은 결코 이룰 수 없는 조건을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사랑은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과 그리스도 그리 고 복음에 대한 아주 소박한 갈망이 생기는 그 순간부터, 비록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해도, 신앙은 우리 안에서 이미 자라나기 시작한 것입니다.(20) 교회가 지극히 소박하게 사람들을 맞이할 때,(21) 그리고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한 사람 한 사람 인간 존재의 신비를 이해하려 한다면, 교회는 그 본연의 가장 투명한 모습, 곧 사랑 의 빛이 됩니다.(22)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새 세대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하느님과의 친교를 열 망하고(23) 그리스도께 대한 분명한 신뢰를 살아갑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 물음은 남아 있 습니다. "세상의 많은 지역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신앙의 신뢰에 무관심하고 교회의 기도 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24) 그래서 우리 모두 안에는 이런 절박한 질문들이 솟아납니다.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멀어지는 이유를 마음을 다해 찾지 않고 단 하루인들 그냥 보낼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상황에서 단순 소박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이 사랑과 친교의 공동체, 곧 그 분의 교회에 의지하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지금 당장부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습니까? 화해한 백성으로 살아갈 소명이 있다는 것을. 그것은 오늘날 지극히 긴박한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 화해의 성소를 통해 복음은 맨 처음의 그 신선함을 드러냅니다.(25) 우리가 화해하여 살아갈 때 그것은 우선 그리스도인 사이의 친 교에 다시금 참 의미를 가져다줍니다. 다른 한편, 세속화된 사회 안에서 모든 화해 행위 는 일용할 양식처럼 필요 불가결하다는 사실에 그리스도인들이 더 관심을 가지게 할 수 있습니다. 이 귀중한 소명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신자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에게까지 마음의 평화 안에서 복음의 빛을 발합니다.(26)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떠나가는 이 공백 앞에서 성령은 작은 불꽃을 지피 기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이 불꽃은 사랑의 경이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두려움에서 건 져냅니다. 그 사랑만이 우리를 멀리 이끌어 내어 화해에 이르게 합니다. 이 불빛은 어쩌면 지극히 희미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믿음은 우리의 어두운 부분까지도 비추어 줍니다. 그리고 거기에 성령의 불이 밀려듭니다. 이불은 자비입니다. 교회 안에서 직무를 감당한 이들에게는 자비의 문들을 열어젖히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랑하고 기도하고 그리스도와 복음 때문에 자신의 삶을 내어주는 모험을 감행하는 남자 와 여자, 어린이들이 이 세상에 있는 한 우리는 인류 가족의 미래에 대해 안심하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27) 하지만 실패와 좌절로 얼룩져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우선 눈앞에 닥친 자신들의 미래입니다. 그래서 이런 심각한 물음이 제기됩니다. 자신의 미래가 막혀 있을 때 어떻게 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28) 사랑하기로 선택한 것은 오늘날 실업으로 심한 곤란에 처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을 또한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소외된 사람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만한 생활 조건을 만드는 길을 찾겠습니까?(29)
투쟁과 묵상이 다 복음의 실상일진대, 인간의 시련과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우리의 삶을 내어 줄 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린이 하나가 애정의 단절로 깊은 상처를 입었을 때, 누가 무한한 분별심과 인자함을 가지고 그를 동반할 줄 알겠습니까? 있는 그대로 사랑 받는다는 느낌을 갖지 못한 채 버림받았다는 생각으로 불안과 근심에 쌓인 어린이가 그것에서 헤쳐 나가도록 누가 그를 도와 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우리의 발걸음이 무겁고 힘들게 될지라도, 여전히 사막에 피어나는 꽃을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신뢰의 숨결이 우리로 하여금 다함없는 선함의 길로 끊임없이 나아가도록 해 줄때 이 꽃은 새벽녘에, 거듭되는 새 출발의 시간에 피어납니다.(30)
우리 존재의 궁극적인 의미의 하나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사랑하는 동시에 그 이상의 것, 곧 영원히 끝나지 않을 삶을 고대하는 것입니다.(31) 때로 지극히 복잡한 우리 사회 안에서(32) 복음은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33)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한 줄기 빛을 던져 줍니다. 어디에 이 보물이 있습니까? 그것은 기쁨과 마음의 평화로 옷 입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주위의 삶이 아름답게 피어날 것입니다.
로제 형제의 기도
우리의 평화이신 예수님,
복음에서 당신은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너희에게 성령을 보낼 터인즉 그분은 너희 안에 영원히 머무시리라."
그러므로 당신의 성령으로부터 우리를 멀리 떼어놓는 모든 것을
기도의 도가니 속에 던져 버릴 수 있게 해 주소서.
우리의 평화이신 예수님, 우리가 신뢰를 잃게 될 때,
부활하신 당신은 친히 우리 안에 작은 불꽃이 피어나게 하십니다.
이 불꽃은 지극히 작은 것일지 모르지만
믿음은 이미 우리의 밤을 밝히고
거기에 하느님의 불, 곧 성령이 밀려듭니다.
주 석
(1) 1995년 5월 남아프리타 공화국에서 열린 젊은이 모임을 통해 우리는 이 나라에서 피어나는 희망 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나라의 남자와 여자 그리고 젊은이들은 아주 적은 것을 가지고도 정의와 평등을 위해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일을 해내고 있습니다.
(2) 서구에서는 1970년대 무렵에 영적 가치의 동요와 붕괴가 시작되었고, 이로 해서 커다란 공백이 생 겨났습니다. 사람들은 이 공백을 온갖 것으로, 때로는 아주 기이한 생각들로 채우기도 합니다. 그 여러해 동안 사회의 동요는 때로 워낙 커서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의식이 상처를 입기에 이르렀습니 다. 수많은 단정적인 판단과 수많은 가혹한 표현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압박 속에서 어떤 이들은 그때까지 살아왔던 가치를 더 이상 믿지 않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때제에서 우리들은 이렇게 생 각했습니다. "그리스도 인들은 결코 '불안의 주인들'일 수가 없으며 오히려 '신뢰의 종들'이라고." 그리하여 "범세계적인 신뢰의 순례"를 시작할 생각이 태동되었습니다.
(3) 마태오 25:40 참조
(4) 헤르마스(2세기)
(5) 요한 14:16 및 16:7 참조
(6) 히브리 13:8 및 마태오 28:20 참조
(7) 갈라디아 2:20 및 고로사이 3:3-4 참조
(8) 교육은 전혀 받지 목한 사람이나 아주 많이 배운 사람에게나 신앙은 똑같이 그리스도와 성령께 대한 겸손한 신뢰로 남아 있습니다. 복음의 부름은 무엇보다 우선 마음에, 다시 말해 인간의 가장 깊은 내 면에 와 닿습니다.
(9) 의혹(회의)는 누구에게는 생겨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혹을 그렇게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조차 그분 바로 곁에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한 신자는 그분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당신께 신뢰하고 의탁합니다." 하지만 그 는 곧바로 이렇게 덧붙입니다. "저의 불신앙을 도와주십시오."(마르코 9:24)
(10) 마르코 10:21
(11) 루가 9:62 참조
(12) 에페소 5:19-20 참조
(13) 때로는 적은 말 혹은 단 한 마디만으로 충분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동방 교회의 일부 그리스도인 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예수 기도)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의 이름만을 반복해 부름으로써 깊은 친교에 이릅니다. 짧은 기도말을 끝없이 노래함으로써 마음에 드리운 그 늘을 몰아낼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 그리스도여, 내 어둠이 내게 속삭이지 말게 하시고, 내가 당신의 사랑을 맞이하게 해 주소서"(성 아우구스티누스 400년경).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오래된 기도를 거듭 반복합니다. "근심과 걱정 가지지 말라, 하느님 만으로 족하도다." "그리스도여 당신 안에 내 마음의 평화가 있나이다." 어떤 이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루가 복음 말미에서 제 자들이 한 것처럼 이마를 바닥에 조아리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루가 24:52 참조)
(14) 로마 8:26
(15) 루가 9:29 참조
(16) 히브 5:7 참조. 예수께서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 신뢰의 기도를 발하시는데 우리 또한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 손에 내 영을 맡기나이다"(루가 23:46)라는 기도입니다. 이 것은 다시 말해 "당신 손에 내 삶 전부를 맡기나이다"라는 뜻입니다.
(17) 필립비 4:6-7 및 1베드로 5:7 참조
(18)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성성(聖性)을 발하면서도 스스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 어쩌면 그 것을 감히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19) 젊은이들이 지역 교회의 기도에 동참할 수 있다면 그들은 윗 세대 사람들에게 새롭게 희망을 줍 니다. 많은 사람들이 본당 공동체(개교회)에 기대는 것은, 너무 많은 말로 가득 차지 않으면서도 하느님의 신비가 금새 감지되는 기도의 장소가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최소한 한달 에 두번씩 금요일 저녁, 아주 소박한 기도를 교회 안에 준비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아름다운 노래와 침묵을 곁들인 기도는 그리스도와 그리고 성령과의 친교를 열어줍니다(기도 중 침묵의 시 간은 단 한번으로 족합니다. 너무 잦은 침묵은 기도를 무겁게 합니다). 세속화된 사회 안에서 그 리스도의 상징 몇몇은 우리의 보금자리에 둠으로써 보이지 않는 그분의 현존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것도 좋습니다. 성화 하나, 촛불이나 등잔 같은 것들로 우리의 거처 한 쪽에 아주 작고 소박하게나 마 기도를 위한 공간을 꾸밀 수 있습니다.
(20) 어느날 17세의 젊은이 하나가 떼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열 서너 살이 되기 이전에는 신앙 에 관한 질문을 하나도 가져 본적이 없었다. 이제는 그런 물음을 가지고 많은 생각을 한다. 성서를 읽었지만 사실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두세 차례 성찬식에 참석했는데 바로 거기서 일생중 가장 큰 감동을 받았다. 하느님의 은총이 마치 나를 흠뻑 적시는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믿 기 시작했고, 그 뒤 어느 날 나에게 신앙을 이해시켜 줄 사람을 만날 필요를 느꼈다."
(21) 개인의 삶에서나 교회의 삶 속에서 단순 소박함은 결코 차가운 엄격함이나 단조로움에 빠지는 것 이 아닙니다. 단순 소박한 정신은 평온한 기쁨, 즐거운 마음 안에 드러납니다. 단순 소박하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적은 것이라도 적절하게 배치하고 사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22) 다른 사람 앞에서 복음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기도를 하도록 불리운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위협하는 것은 네 기도와 말속에 결코 한 마디도 담지 말 기를!"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심으로써 억지로 잡아끌지 않으십 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욕과 고난을 당하셨을 때조차 아무도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1 베드로 2:23 참조).
(23) 그래서 우리 모두 안에는 이런 절박한 질문들이 솟아납니다.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멀어지는 이유 를 마음을 다해 찾지 않고 단 하루인들 그냥 보낼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상황에서 단순 소박한 마 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이 사랑과 친교의 공동체, 곧 그 분의 교회에 의지하면서 우리가 구체적으 로 지금 당장부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24) 어떤 젊은이들에게는 본당(개교회) 생활에 참여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선택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전달하기 위한 사명과 책임을 그들에게 맡기고 또 어른들이 여기에 깊은 관심을 가지 고 협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25) 그런 복음의 신선함은, 자만심이라는 씁쓸한 맛을 뒤에 남기는 극단적인 생각들과는 어울리지 않 습니다.
(26) 어떤 이들은 내적인 공허를 체감하고 이렇게 자문합니다. "하느님은 도대체 어디 계시는가?" (시편 42:4). 그렇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 곁에, 심지어 그분을 모르는 이들 곁에까 지 계시지 않습니까?(1베드로 3:18∼20 참조) 하느님의 영은 인간 한사람 한사람을 찾아오시지 않 습니까?(요엘 3:1 참조)
(27) 많은 이들이 관용이 더 분명한 가치로 자리잡은 평화롭고 화해한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책임 있는 과업을 감당하려고 자신을 준비하고자 합니다.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 은 인류 가족의 미래에 헤아릴 수 없는 전망을 열어 줍니다.
(28) 그들이 인류 가족의 미래에 반드시 무관심한 것은 아닙니다. 많은 이들은 가까이 혹은 멀리 있는 고통에 마음 아파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뻔히 내다보 이는 실패와 좌절에 자신을 내맡기는 셈이고 따라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29) 오늘 이 시점에서 많은 젊은 신자들은 신앙이 그들을 무책임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압니 다. 그들은 세상을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길을 찾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투신이나, 때로는 아주 단순하지만 매우 구체적인 과업을 감당하는 것 등이 그 예입니다. 세상 도처의 고통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의식이 지금처럼 깨어난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잊혀진 이들, 소 외된 이들, 가장 가난한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 곁에서 해결책을 추구하는 그런 사람은 많습니다.
(30) 신앙의 신뢰 안에서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뵈올 것입니다! 어떻게? 정성스럽 게 "모든 것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루가 2:19, 51) 하느님을 보았던 마리아처럼 내적인 눈길로 그 분을 뵙게 될 것입니다.
(31) 필립비 1:21∼25 참조
(32) 세상 어디에 있든 우리는 복잡 다난하고 때로는 흔들리는 사회안에서 살아갑니다. 교회 역시 이 런 사회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만큼 동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서에서 그리스도께 서 우리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상기합니다.(마태 6:25∼34 참조). 이 말씀을 우 리의 삶속에 실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걱정하지 않는 것은 결코 철모르고 순진한 것을 뜻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슬기롭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올바른 식별력을 가지라고 일깨웁니다(마태오 10: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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